숨을 내쉬면 차갑게 얼어붙은 생명이 하얗게 퍼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숨을 다시 들이 마시면 차갑게 시려오는 코 끝과 뇌, 기도 그리고 폐 모두가 새하얀 푸른 금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숨결이 무뎌진 볼에 한차례 늦게 바람이 살며시 간질인다. 휘날리는 머리를 정리하려 귓가를 쓸어 넘기면, 차갑게 식은 두피가 미묘하게 기분이 좋아서 미소를 짓는다. 차가운 계절과 어울리지 않은 여름의 풍요한 과실을 닮은 눈동자가 희미하게 반짝인다. 그 시선에 끝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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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시끄럽게 아이스 링크를 활보하는 그녀는 가끔, 때때로, 종종.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볼 때가 있다. 예전에는 그저 스트레칭 혹은 숨 돌리는 쉬는 시간 정도로 보였다. 하나의 루틴이나 습관이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능력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도 함께 연습하는 도중에 툭 뱉어냈다. 마치 이번에 커피를 바꿨다는 식의 말투였다. 무심하며 대수롭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없이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오랜 고민을 거친 끝에 해준 이야기 같았다. 근거는 없는 동료의 감이 그렇게 말했다.
팀원 모두가 저 작은 체구를 가진 동료의 말에 링크 위를 미끄러져 가는 슬리퍼처럼,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흘러가다 이내 벽에 쿵,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부딪혔다. 초시계 마저 얼어 붙어 버린 듯한 잠깐의 침묵 후 그녀가 혀를 삐죽 내밀고 '뭐' 라는 한마디에 모두가 달려들어 오로라를 덮쳤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도망쳐 달려가다가 잡힌 표정은 제법 우스웠다.
감독이 인상을 구기며 특유의 탁한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두 눈동자는 '오로라 힐. 네가 사고를 칠 줄은 알았지만······.'
"···이딴 건 줄 알았겠냐!"
라며 종이컵을 와작 구기며 그녀에게 던졌다. 우리에게 소리를 질러대느라 탁하게 쉬어버린 목소리도, 화를 내는 감독의 행동들도 익숙한 듯 요령 좋게 그걸 쓱 피하는 뒤통수를 보며 그저 팀원인 나 조차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감독은 이미 그 지경을 넘어선 건지 뒷목을 잡으며 쓰러지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치 싸구려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서도 제법 웃긴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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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라 힐이라고 불린 여자는 결국 감독이 마구잡이로 던진 무언가들에게 한대 얻어 맞은 부분을 문지르며 방을 나왔다. 미묘하게 하나쯤 일부러 맞아 준 것 같은 게 티가 나서 오히려 독이 된 것 같았지만 빨갛게 혹이 난 이마를 본 그녀의 동료들은 배를 까며 웃어버렸다. 이마를 한참 문질러대다가 어디선가 가져온 얼음팩을 탁상에 올려놓고 그 위로 냅다 엎어진 그녀의 뒤통수를 보며 몇몇 질문이 날아들었다. 능력자인 게 정말이냐, 무슨 능력이냐, 능력자로 선수 생활을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느냐, 그대로 자면 죽일거다 등등.
한참을 조용히 질문세례를 듣고만 있던 그녀에게서 나온 첫마디는.
"커어억."
그 말에 팀원들은 또 한바탕 뒤집어져 웃었다. 팀 내의 분위기는 좋아 보였다. 특별히 모난 사람도 없어 보였고, 굳이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걱정하지도 않았다. 애초의 그녀의 행동이 분위기가 무거워지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 같았다. 능청스럽게 말하고 장난스러운 행동을 보여준다. 자신의 능력은 그냥 나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능력일 뿐이라고 말했다. 내가 능력자건 비능력자건 내가 너희와 쌓아온 신뢰와 내가 이뤄낸 것들의 의미가 변색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녀의 말들을 듣고 있자면,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을 골라서 가다듬고 정리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새로운 면모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오로라 힐이라는 사람이 새롭게 다가왔고 그 점이 오히려 그녀가 능력자라는 사실이 와닿게 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말이 뇌리에 깊게 박혀 살면서 계속 언젠가는 문득 떠오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변하지 않았어. 너희가 보던 그대로의 오로라 힐이란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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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슨 씨! 여깁니다!"
"아, 기자님!"
사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한 남자에게 스티븐슨이라고 불린 푸른 머리의 청년이 햇빛에 반사되는 얼음길을 타고 능숙하게 미끄러져 왔다.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이 은색 머리를 가진 기자를 훑고 갔다. 아까의 표정을 본 건지 못 본 건지 청년은 은발의 남자에 손에 들린 것에만 시선이 뺏겨있다.
"제가 우연히 아이스하키 경기 티켓을 두 장이나 얻게 되어서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같이 보러 가실래요?"
"앗, 그 티켓은···! 금세 매진 되어버려서 못 구한 건데! 저야 좋긴 한데···. 이 귀한 티켓을 어디서···."
푸른 머리의 청년은 놀란 눈을 숨기지도 못하고 은발의 남자에게 되물었다. 마침 자신이 가고 싶었던 경기의 티켓을 가지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놀란 표정은 금방 방긋 웃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가 타고 온 얼음길이 부서지며 반짝였다. 마치 청년의 미소가 더 빛나는 듯 보였다.
여러 갈래의 조명들이 화려하게 부서져 내리는 경기장은 이미 만석이었다. 가득 들어찬 사람들에게서는 기대하는 표정과 아니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 이유는 아마 한 선수 때문일 것이다. 오로라 힐. 최근 능력자임을 밝히고도 계속 프로 선수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사람이다. 능력자가 배척 받는 시대에, 그 타이틀을 들고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 건 거의 전례가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몇 년 전에는 친선 경기였음에도 처음 능력이 발휘된 어린 학생의 사고로 인해 프로 선수가 다친 사건이 크게 화제가 되어 스포츠계에서는 예민한 문제로 두각된 적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관심사였다. 게다가 푸른 머리의 청년과는 국적도 같은 인물 이었다. 가슴팍에 커다랗게 새겨진 캐나다 국기가 스티븐슨의 눈에 환하게 들이 찼다.
아이스 하키를 모르는 은발 머리의 기자는 인터뷰를 하고 싶은 청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곳 까지 다다랐던 터라 경기를 보기 전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금방 옆에 있는 청년의 힘찬 응원 소리와 선수의 활약 그리고 함성은 그를 경기장에 녹여들게 하기엔 충분했다. 어느새 몰입해서 옆에 있는 청년과 어깨를 감싼 채 응원을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얼음 바닥이 깔린 경기장의 있는 모두가 그와 같이 함성을 질렀다. 뜨거워질 데로 뜨거워진 그 곳에는 링크 위에 있는 선수들을 모진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그 선수의 실력과 열정에 매료되었다.
"오늘 경기 정말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온 찬사였다. 하지만 그의 속내는 달랐다. 물론 경기가 재밌던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뛰어난 경기력도 당연하지만 관중을 향해 하는 작은 손짓과 인사는 사람들을 더 달아오르게 했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퍼포먼스인지 철저하게 계산된 퍼포먼스인지. 그 작은 기시감이 기자로서의 경고등을 울려댔다. 은발의 기자는 푸른 머리의 청년을 데리고 자연스럽게 복도를 쏘다니다 두 개로 나눠진 복도의 한쪽을 골라, 무언가의 힘으로 아까 그 화제의 선수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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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오로라 선수."
"어···? 응? 저희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건가요? 기자님!"
"누구세요? 기자? 여기는 들어오면 안 되는 거 몰라요?"
능청스럽게 말을 거는 기자와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를 앞에 두고 화들짝 놀란 청년. 그리고 까칠하게 대답하는 하키복 특유의 품이 큰 유니폼을 입은 작은 체구의 선수. 사람들은 이런걸 고급 어휘로 총체적 난국. 다른 말로는 개판이라고 정의 했다.
"저는 가십 페이퍼 기자 클리브 스테플이라고 합니다. 최근 행보에 대해 짧게 인터뷰 가능할까요? 오늘 경기를 너무 흥미롭게 봤거든요."
자신을 클리브 스테플이라고 칭한 기자는 능글맞게 웃으며 선수에게 선뜻 말을 건넸다. 오로라는 그 기자의 말을 흘리듯 듣다가 무시하며 가볍게 손사래를 치고 지나갔다. 아니,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기자 뒤에 서서 자신을 밝게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던 청년과 눈이 마주친 순간 한숨을 푹 쉬며 걸음을 우뚝 멈췄다.
"5분 만이에요."
"차고 넘치죠."
형식적인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던 둘의 인터뷰는 무난하게 끝이 나나 싶더니, 날카롭게 핵심을 쥐어 파낸 기자의 질문에 결국 선수는 소리를 지르며 삿대질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참을 크게 말하던 그녀의 말을 수첩에 빼곡하게 적어낸 클리브는 만족스러운 듯이 웃으며 인사했다. 그 웃음에 선수는 차마 더 화를 내지는 못하고 식식거리며 고개를 홱 돌려 멀어져갔다.
"··· 기자님? 저도 저런 식으로 인터뷰 하실 거예요?"
"하하! 그럴 리가 있습니까. 성격이 워낙 불같아 보이니 쿡 찔러서 진심을 듣고 싶었던 것 뿐입니다."
제가 그래서 적이 많아요. 라는 말을 덧붙이며 기자는 종잇결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탁 덮인 수첩을 주머니에 넣었다. 클리브는 푸른 머리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인터뷰라면 질색할 것 같았는데, 왜인지~? 스티븐슨 씨랑 눈이 마주치고 나서 들어 준 것 같은 건 제 착각일까요?"
그의 말뜻을 알아 차리지 못한 청년은 고개를 살짝 꺾어 의문을 표했다. 기자는 또 재밌는 걸 알아 낸 것 마냥 청년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냐는 표정을 한 채로 말이다.
"저도 이렇게 가까이서 본건 오늘 처음이라고요!"
"하핫.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정말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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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끝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온 그녀는 팀원들에게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 토해내고 있었다. 주로 기자의 욕이었다.
"수염도 삐죽삐죽 나서는! 진짜 마음에 안 들어!"
"푸하학!"
기자의 뒤에 있던 청년에 대해서는 쏙 빼놓은 채 왁자지껄 대화를 이어가던 오로라는 의자에 녹은 것처럼 늘어졌다. 동료들은 그런 습관이 익숙한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다시 다른 화제로 돌리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동료들의 시선이 떠나가고 조용히 앉아있는 오로라는 그 푸른 머리를 가진 청년을 알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는 데에는 스포츠 선수 특유의 냉철함이 도움이 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소리를 질러 버렸지만, 자신이 청년을 보고 놀랐던 점은 잘 감췄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수염이 삐죽삐죽 난 기자에게 들킨 지도 모르고.
그 청년을 처음 본 건 아직 날이 추워지기 전. 한참 햇볕에 내리 쬐는 계절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날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의 시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시점으로 그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게 그녀가 논란의 중심이 되게 한 능력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시야를 볼 수 있는 것. 심플한 능력이었다. 눈이 내리는 한여름의 병원을 둘러보던 오로라는 마침내 사건의 주범들을 발견했다. 건물의 옥상에서 얼음을 생성하고 그 얼음을 조각내 뿌리는 청년과 소년을. 축제 분위기가 된 사람들을 정말 행복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 청년의 미소를.
정말 우연과 우연이 겹쳐 재밌는 걸 발견한 오로라의 가슴은 쿵쾅 뛰었다. 어쩌다 고른 나라, 어쩌다 고른 건물. 그리고 유쾌한 사건과 범인들. 자신의 능력으로 남에게 봉사하는 모습을 본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뱃속이 울렁거리는 이상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 시절의 오로라는 능력자인걸 밝힌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자신의 능력으로 인해 좋지 못한 언론과 사람들의 시선을 무자비하게 받아내고 있을 때였다. 다짐했지만 생각보다 자신이 나약하다고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그 둘을 발견한 건 그 시기를 버텨낼 수 있는 굉장한 힘이 되었다. 하늘에서 흩뿌려지던 얼음 조각들이 찬란하게 빛나며 오로라 내면에 무너져가던 무언가들을 위로해주었다. 다이아몬드 더스트. 무수한 조각들은 빛을 그대로 받아서 모두의 마음에 따스하게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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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스티븐슨."
인터뷰 후에 의자에 녹아있던 그녀는 눈을 뜨며 입 밖으로 청년의 이름을 내뱉었다. 속으로만 읊조린다는 걸 자신도 모르게 밖으로 꺼낸 오로라는 자신의 입을 찰싹 때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료들은 이미 먼저 숙소로 돌아간 건지 조용했다. 그녀도 서둘러 짐을 챙겨서 건물 밖으로 나왔다. 아직 건물들 주위에는 경기를 보러왔던 관객들이 바글바글 거리였고, 근처 카페는 여운을 즐기기 위한 사람들이 자리 잡은 채 대화를 하며 떠들고 있었다. 보라색 후드를 푹 덮어쓴 오로라는 얼굴을 가린 채 거리를 걸었다. 한창 앞쪽이 소란스러운 게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싼 인파를 본 오로라의 눈이 반짝였다. 그 눈은 인파를 가르고 한 가운데에 있는 청년을 발견했다. 한 남자가 얼음 조각에 둘러싸여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집중해서 들어보니 아마도 소매치기를 잡은 듯 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대로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로라는 자신도 모르게 토마스라는 청년과 수염이 삐죽 난 기자가 걸어가는 길을 쫓아 걸었다. 토마스는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방울이 달린 귀여운 모자를 푹 눌러쓴 작은 꼬마를 발견하고는 작은 얼음 조각의 눈을 내려주었다. 놀라며 밝은 미소를 짓는 아이와 씩 웃으며 손을 흔드는 청년의 모습을 바라보는 오로라는 그날,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본 날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오로라는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그대로 행동했다. 하고싶은게 있다면 멈추지 않고, 굳이 흘러가는 걸 붙잡지도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의 이 작은 설렘도, 호기심도,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거라는 것을. 저 선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마음도 온전히 받아 줄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청년은 기자와 함께 어느 가게의 문을 열어젖혔다. 문에 달린 벨이 딸랑거리며 울리는 맑은 소리가 마치 신호탄 같았다. 기나긴 레일을 달려가는 시작음. 멋대로 달려나가기 시작한 마음이 골인지점까지 달려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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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의 팀 일정부터 살펴보았다. 오로라는 이 곳이 아닌 타지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원정 기간 동안 토마스와 최대한 가까워져야 했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온다. 그녀는 늘 이 신념을 가지고 행동해왔기에 늘 무언가를 해내고 있었다. 어느새 어둑해진 저녁 시간, 홀로 늦게 들어온 것도 모자라 우당탕 소리를 내며 문을 열어젖힌 오로라가 팀 매니저를 찾아 소리 지르는 것도, 팀원들이 그 난장판에 익숙해진 것도. 그녀가 해낸 것들 중의 하나였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는 매니저의 질색이 담긴 목소리를 무참히 짓밟으며 강탈해낸 일정표에는 가득 들어 찬 친선 경기와 연습 시간, 공식 경기들 그리고 그중에 틈틈이 휴일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이후로 부터는 그녀의 노력에 따라 달렸다. 여러 우연들이 겹친 만남들을 인연으로 만들어가는 건 굉장한 노력이 필요한 일들이니까. 그것도 어느 한쪽이 강하게 원하는 관계라면···.
솔직히 말하자면, 오로라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우연을 가장한 만남 따위는 솜사탕에 바람을 불어서 구멍을 내버리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그 사람을 수시로 관찰하며 좋아하는 것, 자주 가는 장소를 알아 내기에 아주 유용한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성격상 맞지 않았다. 자신이 싫은 일은 타인에게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로라는 자신을 제어하는 몇몇 제약을 스스로 정해 두었다. 하나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 또 하나는 능력으로 사람을 현혹하지 않는 것. 오로라는 푸른 빛을 머금은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이제 와서 자신과의 약속을 깨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욕심이 넘실거리는 게 느껴지는 자신의 머릿속이 얄궂게 느껴졌다. 이럴 거면 그 벨 소리와 함께 달려가는 마음을 잡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오로라는 무심결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른 이에게는 그저 막힌 천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녀의 눈에는 밝은 도심 속에서도 빛을 내는 별을 담은 밤하늘이 보였다. 그래, 기왕 달리기 시작한 이상 무조건 우승! 자신의 신념을 깨지 않고서도 쟁취해내리란 것을 다짐하며 주먹을 움켜 쥐었다.
···다짐을 한 건 좋았다. '그래서 어떻게?'는 다른 문제였지만.
오로라는 주먹을 움켜 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은 채로 손끝을 초조하게 까딱였다.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아무튼 오늘 그와의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아니 우연일까? 그가 내 팬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번뜩 머릿속을 스쳤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자신의 팀이 출전하는 경기표는 어지간해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올 수 있었던 건 하키를 좋아하거나, 내 팬이거나! 단순하게 결론을 낸 오로라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로 이곳에 또 올 확률이 있지 않을까.
'사람을 계속 관찰하는 건 안 되지만 링크장 건물만 하루 종일 들여다보는 거는 세이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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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생각한 지 3일 째 되는 날이었다. 3일 내내 이 링크장은 자신의 팀의 연습용으로만 사용 되었다. 평소라면 별말 없이 했을 훈련이겠지만 괜스레 마음에 안 들어 지긋지긋한 얼음판을 걷어찬 그녀는 감독에게 또 한차례 꾸중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입술을 잔뜩 삐죽이며 훈련에 복귀한 오로라가 여기저기 몸싸움을 걸고 다니자 감독은 익숙하게 짚은 뒷목을 마사지하며 그녀에게 다시 손짓했다.
"집중 못하지? 응? 그렇게 깡패처럼 치고 다니지 않아도 머릿속이 다른 생각인 게 뻔~ 하게 보여 임마!"
"···눼."
"그래도 내일은 쉬는 날로 잡아 놨으니까 바람이라도 쐬고 와라. 원정경기가 피곤한 건 알겠지만 온 김에 어? 관광도 하고 그러란 말이야! 애꿎은 쟤네 괴롭히지 말고!"
"쟤네도 저 괴롭히는데요."
"네 놈이 먼저···. 아이고, 아이고 두야. 내가 네 덕에 제 명에 못 살지."
"킥킥. 너네 나 괴롭히지 말래~ 감독님이!"
감독의 오바스러운 행동이 웃긴지 큭큭 웃으며 팀원들에게 다가간 로라의 말에 '지랄~'이라는 팀원들의 욕설이 들려왔다. 저것들은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기력이 쇠한 감독은 점점 짐작하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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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기회인데 말이지!"
"무슨 기회"
훈련 도중 틈틈이 중얼 거리던 오로라는 갑작스럽게 끼어든 팀원의 물음에 화들짝 놀라며 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뭘 그렇게 중얼거려 무섭게시리."
"아 미안미안. 입 밖으로 말하고 있는지 몰랐어!"
"그래서 무슨 기회?"
"······. 아니 진짜 별건 아니고."
미묘하게 시선을 돌려대는걸 느낀 건지 그저 귀로만 듣고 있던 팀원들 마저 그녀에게 다가와 추궁하는 경지까지 이르자 오로라는 입을 열었다. 입술을 깨물었다가, 오물거렸다가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기를 몇 번. 답답해하던 팀원이 머리를 한대 쿡 쥐어박자 그 덕에 나온 것 같은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나 관심 있는 사람 있어."
"와아아! 하하! ···거짓말이지?"
믿기지 않는 소리를 들은 것 마냥 모두가 거짓말이라고 하면서도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간 게 제법 신나 보였다. 다 같이 바닥에 엎드려 스트레칭을 하다가 난데없이 고백을 해버린 오로라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안 믿을 거면 왜 물어봤냐고 소리를 빽 질러댔다. 그 반응이 더 진짜 같이 다가온 듯 팀원들은 어머 소리를 내며 그녀를 달래 주었다. 그러면서도 꼬치꼬치 캐물어 대는 바람에 결국 술술 불어버린 오로라는 그래서 내일은 바쁘니까 먼저 자러 가겠다는 말을 끝으로 후다닥 달려 나갔다. 그런 그녀의 뒤로 모두가 꺄르륵 웃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에 오로라의 귀에는 한껏 뜨거운 김이 쉬이익 소리를 내며 빠져나오는 것만 같았다. 방금 빠져나온 게 영혼일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생각 까지 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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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졌다."
어젯밤 자신의 마음을 처음으로 입 밖으로 꺼낸 후 화끈해진 얼굴과 심장을 진정 시키는 데에만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거기까지도 괜찮았다. 하지만 자신을 놀려대느라 방문을 똑똑 두드리고 쳐들어온 팀원들 덕에 늦은 시간이 되고서야 겨우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그 결과 바로 지금. 해가 중천인 시간에 일어나버린 것이다. 다른 팀원들은 이미 도시 구경이라도 하러 나간 건지 조용한 숙소가 더욱 얄밉게 느껴졌다.
부랴부랴 정신을 가다듬고 평소의 루틴처럼 준비를 맞춘 그녀는 자연스럽게 연습복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니 잠깐. 오늘은···. 오로라의 눈이 자신이 들고 왔던 짐들로 향했다. 혹시 모를 일정이 생길 것을 대비해서 화사한 옷들을 몇 벌 챙겨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자리에서 서서 다리를 까딱이며 고민하던 오로라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번쩍 들고 정면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에는 아직 아무도 없이 고요한 아이스 링크장이 빛춰졌다. 그 어둑하고 넓은 공간은 평소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것도 잠시 순간적으로 높은 천장에서 차례대로 쏟아지는 조명의 빛에 눈을 움찔 찡그렸다. 그리고는 문이 열리며 희미한 빛이 느릿하게 새어 나오는 입구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어두운 입구에 희미한 남자의 그림자가 보이더니 이내 환하게 켜진 조명이 그를 비췄다. 토마스 스티븐슨. 바로 그였다.
"···응?!"
도대체 왜 이시간에 그가 그 장소에 있는 걸까. 라는 의문이 퐁퐁 솟아났다. 관객석에 올라가는 것도 아닌 링크로 올라가는 곳에 있는 것이 더 의문이었다. 그런 떠다니는 생각들을 한 번에 터트버린건 바로 청년의 뒤로 달려오는 아이들이었다. 아직은 무거운 장비들을 들기에는 벅차 보이는 앳된 청소년들의 붉게 상기 된 얼굴에 설렘과 기쁨이 만개해있었다. 그러면서 토마스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어 당겼다. 그 장면만으로도 오로라는 현장의 분위기와 감정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을 이곳으로 데려온 건 토마스지만 아이들의 미소에 토마스도 이끌려 온다는 것을. 서로에게 행복을 나눠주고 받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꺼내지도 않은 화사한 옷이 케리어에 삐죽 튀어나와있다. 그 위로 운동복을 입은 오로라의 그림자가 스쳐지나가며 이내 쾅 문소리가 다급하게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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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와 링크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오로라는 평소보다 숨이 차오른다는 걸 깨달았다. 그 이유도 잘 알고 있었다. 기대감과 설렘 그리고 이유 모를 초조함. 늘 자신에게 엄격했던 만큼 자신을 사랑하는 오로라지만 세상 모두가 자신을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최근 들어 더더욱 잘 깨닫고 있었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달려오느라 헝클어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무심 결하게 툭툭 터는 손이 잠깐 머뭇거렸다. 지금이라도 옷을 갈아입고 올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로라는 짐가방들 사이에 파묻혀있던 한껏 차려입은 티가 나는 옷들이 아닌, 평소와 같이 질끈 묶은 머리와 투박하고 편한 옷을 입은 채였다.
"아니! 이게 정답이야. 널 믿어, 오로라!"
쫙쫙 소리가 나도록 양 볼을 두드린 그녀는 입술을 요리조리 움직이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 지루하다. 라는 느낌의 무표정을 유지한 채로 묵직한 문을 열어젖혔다. 익숙한 차가운 바람이 방금의 마찰로 생긴 건지도 모를 뺨의 열을 식혀주었다. 준비를 했음에도 아이들이 꺄르륵 활기차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이 간질거렸다. 애써 잡아 온 표정들이 단숨에 흩날렸다. 자신도 모르게 방긋 웃어버렸다. 이 곳은 그런 장소였다. 닿기만 해도 간질거리고 행복이 차올랐다. 엉성하게 빙상을 달리는 아이들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 중 한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아이가 손을 흔들었다.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던 청년의 시선이 자신에게 다다른걸 깨달았다. 엇 하는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셨다.
능숙하게 빙상을 달려 그녀가 서 있던 곳으로 오던 토마스의 표정은 점점 놀람으로 물들었다. 놀람과 기쁨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 잡던 표정은 결국 활짝 웃더니 밝게 '안녕하세요.'라며 인사해왔다. 그녀도 똑같이 인사말을 건넸다. 조금은 버벅댔지만 자연스러운 인사였다.
"아아, 그, 연습 날? 인 줄 알았지 뭐에요~! 하하."
"하핫. 그러셨구나! 오늘은 저희 팀이랑 저쪽 친구들이랑 친선경기를 하기로 예약해둔 날짜였는데. 헷갈리실 수도 있죠!"
"친선 경기요? 아직은 조금 일러 보이기는 한데···?"
오로라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서 토마스의 뒤쪽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토마스도 멋쩍게 웃으며 아직 배우는 중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에 오로라는 방긋 웃었다.
"당신도 하는거면 그럼 저도 껴서 해도 돼요? 그냥 돌아가기에도 그렇고!"
"연습, 아니 쉬는 날, ···아!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도 평소에 엄청 팬이었거든요. 오로라 선수!"
"···고마워요. 응원 많이 해주세요. 그럼 가보실까요. 감독님?"
"감, 감독까지는 아니에요! 토마스 스티븐슨이에요. 그냥 토마스!"
"네네. 토마스. 저는 오로라 힐입니다. 잘 부탁해요. 앞으로."
"앞으로···?"
오로라는 자신도 팬이라는 말을 하려다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모든 아이들과 가볍게 인사를 하며 차근차근 자세부터 걸음의 보폭을 잡아주었다. 그런 그녀의 뒤로 토마스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공격 받다가 우당탕 넘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살부리는 청년의 목소리와 들뜬 아이들의 목소리가 즐거웠다.
한걸음. 이 장소에 들어온 게 겨우 한 걸음이었다. 시작음은 진작 울렸음에도 겨우겨우 이 안에 녹아들어, 그와 이름을 주고받았다. 오로라는 넘어진 토마스를 뒤돌아보며 웃었다. 다가가 일어나는 걸 도와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아이들이 건넨 손을 잡고 일어나는 토마스의 싱글싱글한 미소가 한 차례 더 오로라의 가슴을 두드렸다.
"아이들한테 밉보이신 거 아니에요? 무차별적으로 당하시는데~?"
"아니에요! 토마스 형이 좋아서 그런 거니까!"
토마스의 손을 꽉 잡고 있는 아이가 오로라를 향해 말했다. 아직 빠진 앞니가 자라는 중이기에 발음이 미묘하게 어눌한 게 아주 귀여웠다.
"흐응~ 좋아하면 괴롭히는 거야? 나도 그러기는 해."
"헙. 형아! 괴롭힌 거 아니야. 그니까···. 이건 포옹인 거야!"
하는 말고 함께 아이가 토마스의 품에 안기자 다른 아이들도 자리를 빼앗길세라 날쌔게 미끄러져 토마스의 앞으로 다가가 찰싹 달라붙었다. 그 모습이 새끼 펭귄들을 보는 것만 같아 오로라는 크게 웃어버렸다.
"인기가 좋으십니다~"
"···꿈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는 멋진 순간이네요."
"뭐야, 인기남이 꿈이에요?"
"아니, 아니! 그게 아니구요!"
"장난이에요. 엄청 놀라시네. 아예 아닌 건 아닌가 봐요? 그래도 뭐, 대충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아요."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오로라는 차가워진 볼을 손등으로 문대며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그 여름날과 별반 다르지 않는 모두의 영웅을. 그 여름을 간직하고 있는 눈을 빛내며 환하게 웃었다.
+&
"애들아! 볼도 중요하지만 조심하는 게 먼저야!"
"형부터 조심하는 게 좋을텐데!"
말하기 무섭게 아이들은 토마스에게 달려들었다. 한껏 올라간 웃음소리들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아직은 스케이팅이 어려워 토마스에게 달려들지 못한 아이가 그들을 부럽게 바라보다가 서서히 닫히는 문을 발견했다. 시선을 좀 더 끌어오니 방금 들어온 건지 새하얀 옷을 입고 있던 특이한 머리의 누군가가 보였다. 손을 흔들어 주었더니 똑같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토마스는 혼자 연습 중인 아이를 항상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소외감을 느낄까 봐 주의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손을 흔들자 의아함을 가지고 다가왔다. 아이의 뒤에 서서 바라보고 있던 방향으로 시선을 올리자 그곳에 있던 건, 밝게 웃으며 자신들을 보고 있던 오로라였다. 토마스는 놀라기도 전에 저 사람이 저렇게 웃을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늘 보던 경기에서는 예민한 표정을 가지고 있었고, 경기에서 이겼을 때 짓는 웃음은 좀 더 열기가 감도는 웃음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 따뜻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걸 보고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녀가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했기에 먼저 다가가 인사말을 건넸다. 버벅대며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니 일정을 헷갈린 것을 부끄러워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언급은 하지 않으려 했는데···.
"연습, 아니 쉬는 날, ···아!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도 평소에 엄청 팬이었거든요. 오로라 선수!"
라며 똑같이 버벅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중간중간 방긋 웃는 표정이 잘 어울렸다. 클리브 씨와 함께 있을 때는 몰랐지만 그는 대체로 잘 웃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특이한 사람이었다. 갑자기 전력 질주로 멀어지더니 아이들을 향해 달려가다가 급 방향을 틀어 얼음 가루를 아이들에게 흩날렸다. 잘게 갈려 나간 얼음 조각들이 조명과 만나 화려하게 흩날려 내려앉았다. 수많은 반짝임들 속에 아이들은 화들짝 놀라며 웃기 바빴다.
가벼운 분위기 속에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어울려 가르치는 모습을 보니 다시금 새로웠다. 여태까지 그녀는 자신과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 여겼다. 멍하니 가까운 곳에 자신과 함께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을 알아차린 건지 방심한 틈을 노려 토마스를 넘어트리는데 성공한 아이들은 꺄르륵 웃어댔다. 그러면서도 모두가 토마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일어난 토마스는 오로라의 놀리는 듯한 말이 부끄러웠지만 뿌듯했다. 자신을 도와주러 뻗어온 아이들의 손이 머리에 남는다. 기억과 마음에 따뜻한 자국을 남겨주는 것 같았다. 이 조그만 온기들로 평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며 웃는 오로라의 눈과 마주쳤다.
왜인지 그녀의 표정이, 모아온 행복한 기억들 옆에 자리했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몇번이고 반복되면 좋겠다고. 그 얼굴을 계속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